2020-02-03 16:04

더 세월(23)

저자 성용경 / 그림 하현
21. 회장의 죽음


안성 금수원에 숨어 있던 회장은 검찰의 압수수색이 임박하자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울타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작은 길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가용에 올랐다. 운전기사는 쏜살같이 차를 이리저리 몰고 남으로 무작정 달렸다. 그렇다고 목적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순천으로 향하겠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기사는 그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주인을 모신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몸에 밴 안목이다. 순천에는 구원파 신도들이 자주 드나드는 마을이 있다. 쫓기는 사람이라면 한 몸 내려놓고 쉬고 싶은 곳이다.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고 점조직으로 구두지시를 내리려면 신도들이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아야 한다.

도피 이후 남긴 A4 용지 31쪽 분량의 메모에서 회장의 당시 심경을 엿볼 수 있다. 개인 여비서 신수진이 보관하고 있다가 검찰에 압수당한 메모는 거울을 보고 읽어야 해석이 가능하도록 거꾸로 쓰여 있다. 오대양 사건에 연루돼 4년간 옥살이를 한 후 고수해 온 스타일이다.

내용 중에는 “가녀리고 가냘픈 大(대)가 남자처럼 태풍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거야.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이 저지른 바람일 거야. 뭔가 미심쩍은 크고 작은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라는 것도 적혀 있다. 大(대)는 박근혜 대통령을, 노인은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의미함은 언뜻 보아도 알만하다.

메모에는 거짓소리, 마녀사냥, 세상이간질 등의 단어가 들어 있고, 도망자의 심경도 잘 드러나 있다. 자신이 음모에 빠졌다는 생각과 언론에 대한 원망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을 찾지 못하는 검찰에게는 “기나긴 여름을 향한 술래잡기가 시작됐다. 내가 나를 숨기는 비겁자가 되었네.” 같은 조롱 섞인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 노년의 비상한 각오와 회복되는 건강을 경축하며.”라고 글을 마무리했다.

2014년 6월 12일 순천 송치재휴게소에서 2.5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매실밭에서 한 사체가 발견됐다. 시신은 부패가 심해 신원파악이 어려웠으나,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뢰한 결과 회장의 DNA와 일치했다. 사망한 지 보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됐다. 자살이냐 타살이냐는 차후 문제다. 대형 사건이 으레 그렇듯 이미 4월에 사망했다는 소문과 지금도 살아 있다는 주장이 꼬리를 물었다.

이들 의혹은 시신이 회장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몇 가지 근거에서 출발한다. 실제 신장이 160센티인데 부검에서 165센티라는 점, 시신이 보름 만에 백골이 됐다는 점, 휘어진 손가락이 없다는 점, 일부 절단된 손가락과 지문이 없는 손가락이 있다는 점, 평소 소주와 막걸리를 마시지 않는데 보해 소주병이 옆에 있었다는 점, 쓰던 안경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등은 음모론의 소재가 됐다.

삶의 애착이 많은 사람이 자살할 리는 없고, 또 쉽게 자연사할 조건이 아닌 상황에서 타살 가능성을 조사해봐야 한다고 힘주어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부는 금니의 수를 부인한테 물어보고, 옷과 신발의 라벨코드를 알아보고, 매실밭 주인한테 자세하게 경위를 물어보면 시신의 진위를 알 수 있는데 수사를 미적거린다고 한심함을 토로했다.

여러 의혹에도 회장의 죽음은 사실로 정리됐다. 그는 죽기 한 달 전 염소탕집으로 알려진 송치재가든(휴게소)에 왔다. 장인 권 목사의 사돈이 소유한 별장이라 신고당할 염려가 적었다. 별장 주인 변 씨는 불안해하는 회장을 안심시키려 애썼다.

“도피생활로 피곤하실 텐데 여기서 푹 쉬십시오. 계곡물이 흐르고 주위 풍광이 참 좋습니다. 필요하신 거 있으면 신 비서를 통해서 말씀해주십시오.”

신 비서란 수행하는 여비서 신수진을 의미한다. 변 씨는 회장을 한가하게 쉬러 온 사람처럼 대했다. 인천에 살던 변 씨 부부는 1990년 회장의 도움을 받아 송치재가든으로 이사 왔다.

그가 숨어 있던 별장 ‘숲속의 추억’은 송치재가든에서 500미터 떨어져 있다. 그 사이에 흑염소 농장이 있다. 별장 옆으로 한가로이 계곡물이 흐른다. 초여름 밤의 숲속은 정적에 싸여 있다. 별장 안의 두 남녀는 어둠의 무게에 눌려 가까이 다가갔다. 불길한 날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한 듯 둘은 서로를 의지했다. 73세의 회장과 33세의 여비서. 40세의 나이 차이는 둘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

별장에 머무는 지난 한 달여 동안 그는 가까이 다가오려는 수진을 나무랐다.

“나는 지금 도피중이다. 지나친 행동은 여호와를 진노케 한단다.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이제 편히 자거라!”

율법적이라고 그는 자부하곤 했다. 그런 절제 덕분에 발각되지 않은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도 오늘은 이브의 날로 돌아가렵니다. 로드(Lord 주님), 오늘 하룻밤만이라도 허락해주소서.”

그의 귀에는 오늘밤이 마지막 밤으로 들렸다.

“너는 나를 버리지 않는구나. 이리 오렴.”

수진의 어깨를 안았다. 몸과 마음은 이미 삶을 정리해 가는 중이었다.

왔구나. 이튿날 5월 25일, 오후 4시 검찰이 별장 ‘숲속의 추억’을 급습했을 때 문이 잠겨있었다. 그러나 별장 안에는 두 사람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바깥의 발자국소리는 고요한 숲속에서 너무도 또렷하게 들렸다.

“수진아, 사람 발자국 소리 들리지 않아?”

그는 그녀에게 물었다.

“회장님,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요. 밖이 이상합니다.”

여비서는 수사관들이 별장 문을 열려고 하는 소리가 들리자 회장을 2층 통나무 벽안으로 급히 피신시켰다. 주종의 신분이 바뀐 것처럼 회장은 그녀의 말을 순순히 잘 따랐다. 그리고 여비서 자신은 방문 쪽으로 가서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발자국이 멈췄다.

“문이 잠겼네. 그냥 따고 들어갈 수도 없잖아!”

수사팀장이 부하들에게 역정을 부렸다.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야 하겠습니다.” 한 부하가 말했다.

다섯 시간 후 밤 9시경 육중한 장도리에 문짝은 우지직 열렸다. 여비서는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문 앞에 서 있었다. 수사관들은 별장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회장은 어딨어요?”

수사팀은 그녀를 다그쳤다.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새벽에 잠자는데 인기척이 나서 눈을 떠보니 모르는 남자와 회장님이 대화를 하고 계셨는데 다시 잠들었다가 깨보니 회장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사관들은 개수대를 흔들어 보고, 책장을 밀쳐 보고, 침대 밑을 뒤지고, 벽을 샅샅이 두드려 봤다. 그래도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두 시간에 걸친 수색에서 소득을 얻지 못하자 수사관들은 그녀만 현장에서 범인도피 혐의로 체포해서 데려갔다.

수사관들이 여비서를 끌고 나가자 벽장 안에 쪼그려 앉아 있던 그는 모처럼 큰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은 결코 붙잡히지 않는 불사조 같은 존재라고 미지근한 웃음을 지었다. 오, 할렐루야!

숲속에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고 바깥에 적막이 흐르자 그는 피곤한 다리를 뻗었다. 장시간 긴장한 탓에 몸과 다리가 다 굳어 있었다. 벽장 안 세 평도 못 되는 면적은 한 몸 눕히기에는 충분했고, 모처럼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볼 수 있었다. 주위가 너무 조용했다. 한 발짝만 나서면 주위에 진을 치곤했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나? 그렇군. 기사는 도망가고 비서는 잡혀가고….

그는 점점 불안해졌다.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현상금 5억 때문에 나를 배반한다? 그럴 리가 없지.”

스스로 위로하며 이튿날 날이 밝기 전 그는 허겁지겁 별장을 빠져나와 숲속으로 향했다. 별장 수색이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몰라 한시가 급했다. 돈 가방은 챙기지 않았다. 25킬로그램 되는 가방을 누구의 도움 없이는 들 수 없었다. 단신으로 탈출했다.

몸과 마음이 피로해질 대로 피로해진 그는 험한 산길보다 개울과 국도변을 타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될 수 있는 대로 별장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 안전하다. 안경도 챙기지 못했다. 머리는 터부룩하게, 콧수염은 아무렇게나 길어 있었다. 양손에는 막걸리병과 소주병이 들린 채.

“술도 마시지 않는 분이 웬 술병을?”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쥐 잡듯이 조여들어오는 수색을 피할 길 없으니, 차라리 행려병자 행세로 추적자들의 눈을 속이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인근의 폐터널에서 주운 술병은 물병으로 사용했다. 터널 옆으로는 그대로 마실 수 있는 맑은 계곡물이 흐른다.

5월 말의 밤은 기온 20도 정도로 이슬만 가려준다면 그런대로 지낼만하다. 용도가 없어진 터널 안에서 밤을 새고 싶었으나 수색팀에 들킬까 그냥 숲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조력자들과 연결이 끊긴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검문검색을 피해 고령과 지병을 무릅쓰고 송치재휴게소를 지나 매실밭에 이르렀다. 지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풀밭에 주저앉고 말았다. 풀벌레 소리에 묻힌 그의 숨소리는 희미한 의식을 확인할 뿐이다.

“양기사, 신비서, 다 없네?”

비로소 혼자임을 깨달았다. 하나님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던 돈마저 수중에 없다. 있어봤자 화장지보다 못한 것이겠지만. 매실밭 고랑을 타고 나직이 흐르던 사람의 신음소리는 이제 완전히 끊어졌다. 그의 사체는 18일 후 밭 주인에 의해 발견됐다. 세상을 아무렇게나 살다간 행려자의 한 사람으로 경찰에 신고됐다.

덕분에 그가 살아서 잡힐까 마음 졸이던 비호세력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누군가가 그를 죽였다 해도 고맙기는 마찬가지다. 시신 옆에는 청해진해운 계열사에서 만드는 스쿠알렌 병이 발견됐다. 주머니에서 유기농 콩알이 몇십 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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