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6-17 17:33
KSG에세이/무늬만 海技士 평생을 짝퉁으로 살며 얻은 벼슬 “해운계 甘草”(2)
서대남 편집위원
G-5 海運韓國을 돌이켜 보는 추억과 回想의 旅路 - (2)
>>> 그러나 던져진 주사위요 엎어진 물이니 되돌아 갈수는 없는 일이고 보니 울며 겨자먹기로 의자에서 등 한번 제대로 못 떼고 하루종일 200자 원고지를 결사적으로 메워 국내외 기사를 작성하는 작업의 연속은 사전 준비기간 없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교통부 해운국 아래 외항과와 내항과가 분리되기 전 해사과장을 역임하고 퇴임한 몇년전 작고한 K씨가 조사담당 상무이사로 부서 책임을 맡아 부임했고 역시 오래전에 타계한 한국해대 항해과 9기 출신의 L씨가 조사부장에 그리고 필자가 중간벨트로 조사역(과장 상당)이란 난생 첨 듣는 직책으로 주전 공격수(?)로 투입되었다.
이어 11살이나 연장인 지방해운국 출신의 K씨가 일본어 해독이 가능하단 이유로 조사계장으로 기용됐고 현재의 한국선주협회 총무이사로 활동중인 L씨가 통계담당으로 약간 늦게 합류했으며 보조업무는 주산이 기본이니 여상을 나온 L양을 뽑아 총 6명이 아쉬운대로 진용을 갖추고 대망의 한국 외항해운업계의 조사와 통계 그리고 홍보를 책임지는 전담부서가 출범한 것이었다.
적은 인원으로 겨우 시늉만 내서 손바닥 만한 조직을 새로이 만들어 놓고는 제자리 걸음도 떼지 못하는 판국인데도 회원사인 외항 해운업체나 정부기관 그리고 유관단체 학계 등등은 뭐나 되듯이 부리나케 무슨 자료에 무슨 통계하며 각종 주문과 문의가 끊이지 않았고 원고쓰기에 수송실적이나 운항통계분석에 정말로 눈코 뜰 사이 없는 여러가지 업무가 연속으로 꼬리를 이었다.
게다가 신설 조사부의 가장 중심되는 업무가 1주일에 두번씩 발간해서 배포하는 협회보 인지라 업무 포커스가 거의 필자에게 부하되고 많잖은 인원에 다른 사람들은 어시스트 역할에 머무는 느낌이 들기도 할 정도였던 것으로 너무나 분주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때를 전후하여 해운업계는 몇 해를 거슬러 70년도에는 한국선박대리점협회(지금의 국제해운대리점협회)가 설립되고 관부훼리호가 부산항에 처녀입항을 했으며 이어 코리아캐미케리(현 한국특수선)가 출범했고 한편으로는 포항종합제철이 기공식을 가진바 있다.
’71년엔 동경제대 출신으로 교통부차관을 역임 후 한국선주협회 이사장을 지내고 퇴임한 김병식씨에 이어 한국해대 학장을 거쳐 선주협회 이사장을 지낸 윤상송박사가 한국해사문제연구소를 만들었고 같은 해에 한국도선사협회가 설립됐으며 현재 필자가 재직 중인 코리아쉬핑가제트도 이 해에 창간됐고 이듬해 ’72년엔 현대조선 울산조선소를 기공했으며 국제협약으로는 해상충돌 예방규칙에 관한 협정(COLREG, 1972)이 채택되는 등 대내외적으로 해운업계는 르네상스를 맞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편 당시 필자와 한 사무실서 함께 일한 책임자로는 사무국 총수가 이사장 직제에서 상근부회장 직제로 변경되자 야당인 신민당의 재선의원으로 원내총무를 지낸 김재곤 전직 국회의원이 부임했으며 당시 협회설립의 산파역을 맡아 장기집권(?)한 K전무이사와 함께 업무와 해무를 맡았던, 역시 70년대에 작고한 K상무이사등 주요한회장을 보필하는 사무국 4명 임원의 경력이 쟁쟁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바로 그해 73년 해운계의 특기할 사항은 7월 23일을 기해 선주협회보가 창간된게 뉴스였고 10월엔 월간 해양한국이 발간됐으며 지방해운국이던 부산항만관리청이 청단위로 승격 발족했다.
또 뒤에 BCTOC 건설의 근간이 된 부산항개발 IBRD 차관협정이 체결됐으며 지금은 역사속에 묻힌 삼양선박 극동상선, 대양선박등이 설립되고 ‘1973 해양오염방지협약(MARPOL)’이 채택된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세계경제상황으로는 ’73년 10월 중동전쟁 결과로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생산을 감축하여 오일쇼크 즉 석유파동이 일어나 해운계는 연료유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아울러 그간 10년 이상 고도의 경제성장을 구가하던 한국경제는 일대 시련기를 맞게 된다.
따라서 이듬해 74년에 들어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으로 80년대의 장기해운 개발을 위하여 재정금융의 제도화, 선박 확보를 뒷받침하는 대응책 강구, 해운업기반 강화를 위한 해운관려 세제개선, 해운산업의 전략산업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교통부는 그해 9월에 “외항해운 육성방안” 과 “외항해운 육성방안 추진대책”을 확정 발표하기에 이른다.
계속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각종 해운지원 내지는 육성대책 발표가 뉴스의 근간을 이루게 되자 국내 각종 해사전문 기자들 뿐만 아니라 종합지 경제지 통신사 방송사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수한 외국의 해운이나 경제전문 언론사 등에서도 한국경제와 해운업의 발전상 취재에 열을 올리는 대단한 경지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피상적으로 뉴스나 기사중심으로 단순히 해운에 대하던 거리감이 우선 기사내용을 소화하기 위해 그 속에 몸을 담고보니 접근은 용이하나 이를 숙지해야 하고 취재원의 입장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지식으로 전달하며 심지어는 논평까지를 담당해야 하는 어려움으로 이어져 그저 배에다 짐을 실어 나르고 운임을 받는 바다의 지겟꾼이려니 생각하던 해운업에 겁먹고 질리게도 되었다.
그래도 일본의 월간 ‘海運’지와 ‘海事新聞’그리고 격일간 ‘海運特報’에서 앞서가는 일본해운의 정보를 얻고 영국의 월간 ‘Fairplay’와 ‘Lloyd’s List’등에서 기사를 발췌 번역하고 국내 해운조선 및 연관성 있는 경제기사 내용을 닥치는 대로 다이제스트 해서 여기에다 전파매체에서 모니터링한 뉴스 등까지 긁어모아 B4 크기정도 20여 페이지를 어김없이 주 2회를 발간하는 단조로운 작업은 계속됐다.
한가지 유리한 여건은 당시의 해운행정 대부분이 수요자인 업계의 의견을 선주협회를 창구로하여 수집하고 이를 여과한 후 종합하여 건의하면 이를 기초로 해서 정책으로 취사선택하고 행정자료로 활용됐었다는 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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