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20 16:28:00.0

3~6개월 유효기한의 일람불 신용장에 Stale B/L 조건을 주의하라

임석민, 한신대학교 경상대학 교수


수하인과 창고임대차계약을 맺은 창고업자가 B/L과 상환하지 않고 화물을 인도했다고 패소한 또 하나의 Korean Case 판결이 나왔다.

온산항에서 액체화물 저장탱크를 운영하는 외국인 투자기업 오드펠(Odfjell; 노르웨이)과 정일스톨츠(Stolts; 스웨덴)는 세녹스라는 유사휘발유 수입업체에게 유류창고를 각각 2년씩 임대하였다.

창고임차자들은 대만 등으로부터 세녹스를 수입판매하는 업체들로 세녹스에 세금이 부과되면서 연쇄부도로 이어져 신용장 대금을 결제하지 못하고 도산했다. 이에 B/L을 소지한 국민은행이 오드펠에게 45억원, 정일스톨츠에게 45억원, 합계 90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는데 서울지법에서 국민은행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오드펠 등 외국인 투자기업은 저장탱크 운영업자(보세창고업자)에게 배상책임을 부과하는 것이 국제관행과 맞지 않는다고 KOTRA 외국인 투자기업 옴브즈맨을 통하여 고충해결을 요청했다. 창고업자는 수입업자와 창고임대차계약에 따라 수입업자가 화물인도를 요청하여 이에 응한 것이므로 창고업자에게 배상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법원은 창고업자는 운송인 및 수하인과 이중으로 창고임대차계약을 맺은 운송인의 묵시적 이행보조자라면서, 운송인으로부터 D/O를 받지 않고 화물을 인도한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해괴한 논리이다. 이러한 경우를 우리는 지록위마(指鹿爲馬)*라고 칭한다. 권력을 쥔 자가 권력의 힘으로 억지를 부릴 때 쓰는 말이다.

내가 아는 바로는 ‘묵시’란 ‘명시’가 없을 때 궁여지책으로 동원되는 개념이다. 명시적 임대차계약이 존재한데, 무슨 묵시적인 임대차계약이며 이행보조자란 말인가? 오드펠과 정일스톨츠는 수하인과 탱크사용계약을 맺은 수하인의 이행보조자이다. 한 다리 건너뛰는 운송인의 이행보조자가 될 수 없다. 만약 그런 논리라면 철도, 트럭도 묵시적인 이행보조자가 되어 책임을 져야 한다.

액체화물인 본건의 경우 누가 뭐라 해도 본선의 밸브(manifold)를 통과하면서 화물인도가 이뤄졌다. 화물이 수하인의 지배로 넘어간 것이다. 따라서 B/L과 상환하지 않고 화물을 인도한 운송인(진오해운)은 이미 10억3천만원을 국민은행에게 배상하고 도산했다.

그런데 국민은행은 그 배상액이 신용장 금액에 미달한다고 엉뚱한 창고업자에게 나머지 금액을 내놓으라고 제소했고 법원이 찬동한 것이다.

B/L을 손에 쥔 국민은행은 마치 조자룡 헌 칼 휘두르듯 이곳저곳 닥치는 대로 들쑤시고 법원은 그런 무모한 횡포에 맞장구를 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누구 말처럼 전혀 깜이 될 수 없는 사건을 사건화하고 애꿎은 피해자를 만들어내니 어처구니가 없다.

나는 이 사건을 보고 한국 법조인들의 자질(資質)에 크게 실망했다. 도대체 계약당사자도 아닌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는 판사들을 말할 나위도 없고, 변호사들의 법 지식도 대단히 의심스럽다. 본건은 애당초 소송이 성립될 수 없는 사건이다.

사전에 사건의 내용을 검토하면 수임할 수 없는 사건인데도 변호사는 수임을 하고, 판사들은 명백한 계약당사자 법리를 무시하고 터무니없는 판결을 하고 있다.

창고업자는 운송인과 아무 관계가 없다. 계약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소송이 성립될 수 없다. 오드펠 등의 항의를 접한 KOTRA가 외국의 견해를 청취하기 위해 일본과 싱가포르를 가서 그곳 법조인들에게 문의한 결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하니 이것이 국제적인 망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참으로 한심한 한국의 법조계다.

설령 재판에서 패소하더라도 판사의 논리를 들어보면 마음으로 승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B/L에 관한 판결은 당사자가 아닌 내가 보아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 계속되고 있다. 법원은 사건의 전말(顚末)에는 관심도 없는 듯 마치 로봇이 판결하듯 기계적 판결을 반복하고 있다.

무슨 소리로 항변을 해도 소용이 없다. “~ 아니다. 이유 없다.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달라지지 않는다.”라면서 전혀 항변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만패불청(萬覇不聽)의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2007년 12월 7일 이용훈 대법원장은, “우리의 재판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상소율이 높다. 이는 당사자들이 재판을 신뢰하지 않고 그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다는 뜻”이라며 판사들에게 더 수준 높은 재판을 주문한 바 있다. 대법원장은 “이런 현상은 우리의 재판에 문제가 있음을 의미하며, 우리는 최선을 다해 재판을 해 왔을지 몰라도 당사자와 국민으로부터 법원이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혹시 각자 맡은 사건이 그저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 온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2007년 1월 성균관대 김명호 교수가 재판에 불만을 품고 부장판사에게 석궁(石弓)으로 위해(危害)를 가한 것을 보면 많은 재판이 억울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특히 B/L과 관련된 판결에 대한 운송인들의 불만을 대법원장이 그대로 대변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B/L은 항해 도중 전매(轉賣)가 가능하게 하는 범선시대의 유물이다. 돛단배 시대의 법리를 한국의 법원은 신주처럼 떠받들면서 국제적 망신과 함께 세계 11위 무역대국 한국의 발목을 붙잡고 무역의 첨병들을 괴롭히고 있다.

법원은 시대에 맞지 않은 법리를 고수하여 은행의 태만으로 발생한 수입업체들의 파산, 사기 등의 피해를 애꿎은 선사, 대리점에게 전가하더니 이제는 창고업체에게 전가하고 있다. 머지 않아 트레일러나 탱크로리 기사에게도 책임을 물을 것 같다.

1985~89년의 제일은행 대 천경/협성의 보증도에 대한 대법원 판결 이후 90~92년의 동원실업사건을 비롯하여 94~96년의 금하방직 원면 불법반출사건 등 모든 B/L에 관련된 판결이 무조건 선사는 70%, 은행은 30%로 일관하여 선사들이 대단히 억울해 하는 판결이다. 최근의 판결은 아예 운송인에게 100% 책임을 지우고 있다고 한다.

법원은 선하증권의 상환증권성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균형감각을 잃고 있다. 근본적으로 상법은 상관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상관습이 바뀌면 법리도 바뀌어야 한다. 200년 전의 상관습에 기초한 B/L의 법리는 이 시대에는 적합하지 않은 면이 적지 않다. 그러나 지극히 높고 막강한 힘을 가진 법원은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들으려 하지 않으니, 지극히 낮고 힘이 없는 선사, 대리점, 창고업자는 스스로 조심하고 주의하는 수밖에 없다.

B/L의 분쟁은 천경/협성, 동원실업, 금하방직 등 모든 분쟁이 한결같이 3~6개월 유효기한의 일람불(at sight) L/C에 Stale B/L이라는 매우 이례적이고 편법적인 신용장 거래방식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원자재나 대량의 화물을 장기간 반복적으로 수입해오는 수입상의 경우는 반드시 거래조건을 확인하여 3~6개월 유효기한의 일람불
L/C에 Stale B/L 조건인 경우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관리를 철저히 하는 수밖에 없다.

오늘이라도 이에 해당되는 고객이 있으면 예의 주시하여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안일 될 것이다.

註 * 指鹿爲馬는 옛날 중국에서 진시황(秦始皇)이 죽자 유언을 위조하여 권력을 쥔 조고(趙高)란 환관이 ‘사슴을 말’이라고 우기면서 반대파를 굴복시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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