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00년간 일어난 전쟁 중 세계사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전쟁은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 1939년의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1950년의 ‘6.25 세계 3차 대전’이다. 1960년대의 월남 전쟁이 6.25전쟁보다 더 많이 보도되고 영화로도 더 많이 다뤄졌지만 세계사의 흐름에 끼친 영향은 의외로 작다. 동남아라는 지역과 동북아라는 지역이 가진 전략적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지역의 외국 사람들은 이 전쟁을 한국전쟁(Korean War)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영어 이름의 이 명명법은 틀린 것이다. 6·25전쟁에서는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미국과 중국 영국, 프랑스 등 당대의 강대국 군인들이 모두 참전했을 뿐 아니라 국제연합의 깃발 아래 총 16개국 군대가 참전했으니 한국, 북한, 중국, 소련까지 한국전쟁의 참전국이 20개국에 이른다. 참전국의 숫자와 그 내용을 볼 때 한국전쟁은 ‘세계 3차 대전’이었다.
잭 리비 교수(Levy)는 전쟁을 치르는 국가들 중에서 적어도 한 편에 당대의 주요 강대국이 포함돼 있는 전쟁을 ‘강대국 전쟁’(Great Power War)이라고 분류하고 있는데 그는 한국 전쟁을 대표적인 ‘강대국 전쟁’의 하나로 분류하고 있다. 북한은 한국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는 보통 명사로 부르고 있다. 북한은 결코 자신이 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저들이 6·25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말하는 그 자체가 자신들이 전쟁 도발국가라는 증거다.
미국이 대공황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으며, 결국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령인 하와이의 진주만을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 공격하자 참전으로 돌아섰다.
전쟁의 막바지에 연합국의 승리가 명백해지자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은 1945년 2월 4일~2월 11일 소련 영토인 크림 반도 남단의 얄타에서 회담을 통해 전쟁 수행과 전후처리 문제, 국제연합(UN)창설 등에 관해 합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럽이 전쟁의 한복판에서 철저히 파괴되는 동안 미국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하고 생산성이 증대되는 등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중국을 통일한 모택동은 대만을 점령하고 미국과 수교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중국과 미국의 수교를 제일 싫어한 사람이 바로 스탈린이었다.
제3차 세계대전인 6·25전쟁은 공산주의자들이 사전에 치밀한 계획에 입각해서 시작한 침략 전쟁이라는 학설을 ‘전통주의’ 라고 말한다면 좌파 사상의 세례를 받은 미국의 한 세대가 대학, 언론 및 사회의 주요 세력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 소련보다는 미국이 오히려 더욱 침략적인 나라라고 주장하며, 공산주의 국가들이 오히려 방어적이었다고 주장하는 ‘수정주의’이론이 등장하면서 한국 전쟁도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수정주의는 1980년대 후반까지 상당히 큰 학술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의 수많은 좌파세력들도 이 학설에 큰 영향을 받았고 유럽의 사회주의가 몰락한 지금도 주체사상을 버리지 못한 종복세력인 얼간이들이 ‘6.25남침’이라며 한국사회를 갈등과 분열로 몰아넣고 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미끼로 이용, 미군 등 유엔군과 중공군을 한반도로 끌어들여 국제전쟁터로 만들었다. 한국군, 북한군, 중공군, 미군, 유엔군, 그리고 민간인들을 합쳐 약 300만 명이 죽었다. 전쟁을 일으킨 소련의 인명 피해는 조종사 수백 명 정도이다.
스탈린의 목적은 ‘한반도를 국제전장으로 만들어 이곳에 미국과 중국을 끌어들여 싸우게 하는 것이었다’는 데 연구자들의 의견이 거의 일치한다. 6.25는 스탈린이 기획하고 지휘하고 그의 죽음으로 휴전된 전쟁이다.
당초부터 김일성과 스탈린의 목적은 달랐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공의 도움을 받아 남한을 쳐부수고 한반도를 공산화 통일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스탈린은 중국과 미국이 한반도에서 한판 붙어 오래 싸워 출혈로 양국을 약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중국은 미국 등 서방세계와 적이 되므로 자연히 소련에 의존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소련의 세계전략에 유리한 판도가 만들어진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일본이 중국과 싸울 때 장개석 정부를 도왔던 미국과 모택동도 대만을 점령하고 나서는 미국과는 수교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스탈린은 중국과 미국이 가까워지는 것을 막는 것을 전략의 최우선 순위를 두었다. 중국과 미국의 접근을 막는 가장 좋은 길은 서로 싸우게 하는 것이었고 그 무대를 한반도로 설정한 것이다. 김일성은 도구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김일성이 기습 남침의 여세를 몰아 단시간에 부산까지 밀고 내려가 한반도 적화통일을 성공시키면 미군의 상륙이 불가능해지고 스탈린의 목적은 이뤄질 수 없다. 미국이 들어오고 이어서 중국군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북한군이 너무 빨리 부산을 점령하면 안 되는 시나리오였다. 그래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조기 승리를 막기 위하여 여러 가지 수를 썼다는 주장이 나온다. 정 창-존 핼리데이 공저인 ‘모택동 비화’와 소른턴 교수(조지 워싱턴 대학)가 쓴 ‘왕따’(ODD MAN OUT)이란 책이 대표적이다.
조갑제 닷컴 자료를 보면 황장엽 선생이 작고 전에 조갑제에게 비화를 들려주었다. “김일성이 서울을 점령한 뒤 근 1주일을 머뭇거리면서 한강을 건너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 원인에 대하여 김일성은 스탈린을 탓하며 스탈린이 도하장비 등 군수지원을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스탈린이 북한군의 남진을 고의로 늦추었다는 생각을 하더란 이야기였다.” 소른턴 교수도 같은 맥락의 주장을 한다.
(1)소련이 만들어준 남침전쟁계획서에는 서울점령까지만 적혀 있었다. 서울을 점령하기만 하면 후방에서 남로당 지하 조직원 20만 명이 들고 일어나 이승만정부와 국군은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2)국군은 기습을 받았지만 항복을 거부하였고, 남로당의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미국은 파병을 결정하였다.
(3)김일성과 지도부는 당황하였다. 일부는 점령한 서울을 지켜내는 데 주력해야 한다며 한강 도하를 반대 할 때 스탈린이 개입해 한강을 건너 부산을 향하여 진격하라고 압박한다.
(4)김일성은 전쟁을 지휘 할 때 스탈린의 명령을 구하고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스탈린은 북한군이 너무 빨리 부산항을 점령, 미군이 상륙할 수 없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계산, 북한군의 남진 속도를 늦춘다. 일례로 주력을 분산시킨다. 정예 6사단을 떼 내어 전략적 가치가 없는 호남지역으로 보낸 것이다.
(5)스탈린이 미국을 불러들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중공군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취한 가장 중요한 조치는 유엔 안보리 회의에 불참, 유엔 차원의 무력개입을 막지 않은 것이었다. 이는 스탈린이 말리크 유엔 대사에게 회의참석 차 가다가 자동차 사고를 빌미로 안보리 이사회에 불참하도록 지시한 사실이다. 대단히 중요한 것은 6·25전쟁 때 한국이 살아남은 ‘5가지 기적’같은 일이 있었다는 점이다.
상기한 ‘5가지 기적’중 둘째, 유엔 상임 이사국 회의에서 유엔이 ‘참전’ 결의할 때 소련대표가 불참한 것과 넷째, 북한 침공군이 서울을 점령 후, 1주일간을 이유 없이 지체했던 사실이 스탈린이 기획하고 연출한 ‘세계 3차 대전’임을 확인시켜 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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