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11-29 17:36
어디선가 들은 말이다.
직장인의 꿈은 돈 걱정 안해도 되는 팔자 좋은 백수라나.
이런 말을 하면 정석대로만 세상을 살아가는 FM파에게서‘세상을 그렇게
안일하게 살아서는 안된다’라는 훈계의 말도 나올법하다.
하지만 그들은 알까.
복잡함이 지나치면 오히려 단순해진다는 것을.
생각이라는 것도 너무 많이 하다 보면 지긋지긋해져서 단순하게 살고픈 욕
구가 생기기도 하고, 아주 복잡해 보이는 문제도 실마리를 찾아가다 보면
의외로 단순한 경우도 많은 법이다.
단지 결정을 내리기 위한 용기가 필요할 뿐.
어제 저녁 내내 정몽준 센터장의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들이었다.
S물류센터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크고 작은 문제들.
이런 문제들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부터 겁먹고 단호한 결정
을 내리지 못하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에서 발생된 것은 아닐까.
혹은 이쪽 일을 너무 오래 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성에 젖어 버린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들어버린다.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말 중의 하나였다.
누구엔가에게 혹은 무엇엔가에게 길들어버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마는 것.
가장 경계하며 살아온 것에 이미 자신이 무방비 상태로 당해(?) 버린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어제 저녁 하일성 대리의 열정적인 말을 듣고
난 뒤였다.
나도 한때는 저 친구 못지 않았는데.
따끔하게 한마디 하면서도 은근히 그 열정이 부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한
터였다.
그러면서 그에 관해 갖고 있던 못마땅한 감정들이 조금쯤은 사그러든게 사
실이었다.
아직 물류센터 업무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틈틈이 올리는 제안서들
에서 하일성 대리가 얼마나 이곳 업무에 열성을 기울이는지 그는 알고 있
었다.
「물류센터에는 문턱이 사라져야 한다」
수시로 장비를 통해 물품들이 드나드는 곳이 물류센터인데 곳곳에 설치되
어 있는 턱은 불필요하다는 것이 그가 얼마전에 올린 제안서의 요지였다.
이것 외에도 그가 틈틈이 올리는 제안서는 부지기수였다.
어떤 것을 제법 쓸만하고 어떤 것은 정말로 한심해서 솔직히 헛웃음만 나
오는 것들도 있었다.
바쁠때 이런 제안서가 들어오면 ‘이놈이 먹지도 자지도 않고 제안서만 쓰
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와는 영 딴판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일성 대리의 성
격은 묘하게도 그와 유사한 면이 많아 일종의 동지애가 느껴지고는 했다.
아마도 겉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서로 틀려서 그렇지 물류센터에 대한 애정
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사람들이어서가 아닐까 하고 그는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사실 어제 저녁 하일성 대리가 말한 ‘주문선과 주문시간의 제한’은 물류
센터 업무를 제대로 이뤄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라
는 것을 그도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어느 정도 물류센터 업무의 흐름을 파악한 사람이라면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나서서 그것을 할만한 파워가 그에게 없음을 하일성 대리는 왜 모
른단 말인가.
정몽준 센터장은 답답함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자신도 젊은 혈기와 왕성한 의욕으로 넘쳐흐르던 시절, 영업부와 지독하게
싸우면서 그것을 이뤄보려고 무진장 애를 썼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신과 같은 과장급의 센터장들이나 하일성 대리와 같
은 직급에서는 아무리 머리 터지게 덤벼들어도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주문시간과 주문선을 지켜달라고 영업소장들이나 영업부 직원들과 실랑이
도 해보고 애원도 해보는 등 별짓을 다했지만, 그들에게도 밥줄이나 마찬
가지인 것이 영업이 아니던가.
코방귀를 뀌면서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는 그들이 밉살스럽다가도 한편으로
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월급쟁이인 그들의 신세가 동정이 갔다.
이래저래 머리를 굴리던 정몽준 센터장이 나름대로 생각한 복안은 자신들
의 업무에 바람막이를 해줄 임원급의 등장이었다.
그것도 적어도 이사급으로.
사실 그가 다른 물류센터 직원들에게 말을 안해서 그렇지 그는 개인적으로
사장과의 면담에서 이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또한 자신과의 면담에서 사장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넌지시
비친터라 그는 어느정도 됐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정몽준 센터장이 어떻게 보면 열악하다고 할 수 있는 환경하에서도 S물류
센터에 근무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원우빈 사장의 물류에 대한 이해
와 관심에 승부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해서 일하기 편한 자리를 구할 수 있는 기회도 여러번 있었
지만 그것보다는 앞으로의 가능성에 표를 던졌다고나 할까.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런 이유로 어느정도 한시름 놓고 있는 정몽준 센터장
이었지만, 이 외에도 산적한 문제들로 그의 머리는 깨질 듯 아파왔다.
독자에게 묻습니다.
S물류센터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주문선과 주문시간의
일정한 제한이 없이 시도때도 없이 오는 주문 모두를 수용한다는 것입니
다.
장기적인 측면에서 볼때 이것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즉 주문시간과 주문선의 일정한 제한이 필수적이죠.
하지만 이것은 말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될까요.
독자의 조언을 기다리겠습니다.
유민정 기자 앞으로 보내주십시오.
Tel: 02)733-0040(교:423)
FAX:02)737-3771, 732-3771
0/250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