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테이너 야드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개의 ‘출고지시’가 순식간에 전자신호로만 오간다. 종이 서류가 실물로 교환되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데이터와 전자신호가 물류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대법원의 심리불속행 상고기각 판결로 확정된 서울고등법원 2022나2026333 판결은 화주가 하우스 선하증권 또는 하우스 화물인도지시서가 아닌 마스터 화물인도지시서 상환만으로 화물이 인도되었다며 컨테이너 터미널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안이다. 법원은, 컨테이너 터미널은 선사(운송인)가 발행한 마스터 화물인도지시서에 따라 화주에게 화물을 인도하면 족하고 실무에서도 터미널은 선사 등이 발송한 마스터 화물인도지시서 등이 담긴 COPINO(사전반출입정보) 등을 확인한 후 화물을 반출할 뿐이므로, 터미널에게 하우스 선하증권 또는 이에 근거한 하우스 화물인도지시서와의 상환으로 화물을 인도할 의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COPINO는 국제적으로 표준화된 EDI 메시지 형식으로, 운송사가 컨테이너 터미널에 전달하는 운송 오더(order) 정보다.
이 판결은 전자화된 컨테이너 반출 시스템이 선사가 발행한 전자 화물인도지시서와 COPINO 정보를 기반으로 작동하며, 이 전자신호가 컨테이너 터미널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는 현실을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최신 판결은 2009년의 대법원 판결(2009다39820)과 비교하면 의미 있는 변화를 보여준다. 당시 대법원은 “보세창고업자가 선하증권과 상환하지 아니하고 운송인 등의 지시 없이 운송선사 발행의 마스터 화물인도지시서만을 확인한 채 해상운송화물을 수입업자에 인도한 행위는 하우스 선하증권 소지인의 화물인도청구권을 위법하게 침해한 것이어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라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컨테이너 화물 반출 프로세스는 이미 전자 기반으로 표준화되어 있다. 컨테이너 터미널 게이트에서는 OCR 카메라와 RFID 장비 등으로 차량번호와 컨테이너 화물 정보를 자동 인식하고, 모든 단계[통관 완료, 선사의 화물인도지시서 발행, (육상)운송사 배차, 터미널 게이트 통과, 야드 상차, 게이트 아웃 순]가 실시간 데이터로 연결된다. 복잡한 종이 서류는 자취를 감추고 시스템 데이터와 로그가 법적 효력을 가지는 환경으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국제물류 환경의 디지털 전환 속에서 서울고등법원 2022나2026333 판결은 단순히 법리적인 해석의 변화를 넘어 디지털화된 실무를 반영하여 이제는 컨테이너 터미널이 마스터 화물인도지시서와 COPINO 정보를 확인했다면 그 책임을 면한다는 현실적인 기준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번 판결은 디지털 환경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책임 경계를 재정립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화주 입장에서는 하우스 선하증권의 권리 보호가 약화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운송주선인에게는 하우스 선하증권 관리에 대한 책임 소재가 더 명확해졌다. 운송주선인은 하우스 선하증권과 마스터 선하증권 사이의 연결고리로서, 하우스 선하증권 회수와 화물 인도 문제를 보장해야 하는 책임이 강화된 것이다.
물론 디지털 전환의 과도기에는 다양한 법적 위험도 존재한다. 시스템 오류나 사이버 보안 침해로 인한 화물 오인도 사례가 발생할 수 있고, 이 경우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질 수 있다(사이버 위험에 관하여는 필자의 2024. 12. 칼럼을 참조하면 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컨테이너 터미널의 책임 범위를 종이 기반 시스템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은 현실과 괴리가 있다. 따라서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 진일보한 법리 해석이라 본다.
법원이 현장을 따라잡기 시작
보수적인 해운업계의 최근 주된 관심사 중 하나는 디지털 전환의 가속화이다. 전자 선하증권뿐만 아니라 자율운항선박,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등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운영의 효율성을 극대화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산업과 현장에서는 이미 변화가 시작되었는데, 이를 뒷받침해야 할 법과 제도, 관행이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있는지 여부가 변화의 성패를 판가름할 것이다.
세계 주요 항만은 이미 페이퍼리스(paperless) 시스템을 도입해 나가고 있다. 싱가포르는 2021년 전자거래법 개정과 정부-주도 TradeTrust 프레임워크를 통해 전자 선하증권에 법적 효력을 부여하였고, 싱가포르계 글로버 항만운영사인 PSA 인터내셔널도 관련 파일럿에 참여하고 있다. 로테르담 항만은 선박 입항부터 컨테이너 반출까지 대부분의 핵심 절차를 전자화했다. 아랍에미리트(UAE) 항만운영사 DP월드도 자사 글로벌 터미널 간 디지털 문서 교환 표준화를 확대하고 있다. 이들 사례는 디지털 전환 과정에서 드러나는 법적·실무적 과제를 해결해 가는 선도적 모델로서 참고할 가치가 있다.
디지털 해상물류 시대의 법적 프레임워크를 구축하는 것은 단순히 기존 관행을 디지털화하는 차원을 넘어, 새로운 물류 패러다임에 맞는 법률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법원은 미약하게나마 이러한 변화에 보폭을 맞추기 시작하였다. 법조계와 해운업계가 함께 이러한 변화의 방향을 설정하고 선도해 나갈 때, 우리나라는 디지털 해상물류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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