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선사들이 주요 거점 터미널을 빠르게 선점하면서 우리나라 해운·항만기업의 해외 컨테이너터미널 확보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안정적인 선석 확보와 공급망 경쟁력을 강화하려면 터미널 투자가 중요하지만 진입 장벽이 높다는 설명이다. 이에 소수지분 투자와 블라인드펀드 조성 등 현실적인 투자 방식을 마련하고, 정부와 정책금융기관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재원과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한국해양진흥공사는 8월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토론회를 열고 국내 기업의 글로벌 컨테이너터미널 확보를 뒷받침할 정책·금융 지원 방안을 논의했다. 행사는 조승환 국민의힘 국회의원 주최, 해진공 주관으로 진행됐으며 국회와 해양수산부, 해운·항만·물류업계, 금융권, 학계·연구기관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김형기 HMM 투자전략팀장은 ‘글로벌 컨테이너 터미널 확보 방안 토론회’에서 “글로벌 선사들은 주요 거점 터미널을 확보해 공급망 수직 계열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며 “주요 터미널을 확보한 선사가 이를 얼라이언스 협상 수단으로 이용하면 미확보 선사는 배제될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최근 글로벌 대형 선사들은 항만운영 자회사를 두고 주요 터미널의 지분과 운영권을 확대하는 추세다.
김동환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국제물류투자분석·지원센터장은 글로벌 공급망 리스크가 커지면서 항로와 생산거점 재편이 빨라지고 신규 지역의 물동량과 항만터미널 수요가 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 센터장은 “장기적으로 유망한 지역을 꼽는다면 중국발 물동량이 늘고 있는 아세안, 성장이 두드러지는 인도, 해운 네트워크 재편과 중동 리스크에 따라 유럽의 환적 거점으로 활용되는 아프리카, 단기적으로는 남미”라고 분석했다.
“진입장벽 높아”…단계적 시장 진입 모색
문제는 실제 투자로 이어질 수 있는 터미널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이날 전문가들은 해외 거점 터미널 확보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주요 선사와 터미널 운영사들이 우량 자산을 선점한 데다 투자 경쟁까지 치열해 원하는 지역에서 적절한 조건의 운영권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김형기 팀장은 “컨테이너터미널을 확보하려고 노력해왔지만 현실적인 벽에 부딪혔다”고 말했다. 터미널의 수익성이 높아지면서 일부 항만에서 과도한 조건이나 물동량 보증을 요구하고, 경쟁사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투자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HMM은 올해 7월 수립한 중장기전략에 따라 2030년까지 해외 터미널 관련 사업에 4조4000억원을 투자하고, 미국 남미 인도 등 주요 지역에 자영터미널이나 운영사 지분을 확보할 계획이다. 터미널 투자를 담당하는 조직을 사장 직속으로 둬 의사결정 속도를 높였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적합한 자산을 지속적으로 물색한다는 방침이다.
| ▲왼쪽부터 김동환 한국해양수산개발원 국제물류투자분석·지원센터장, 김형기 HMM 투자전략팀장, 박종연 해양진흥공사 인프라금융부장 |
주요 컨테이너 항만에서 터미널 지분과 운영권을 단독으로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도 과제로 꼽혔다. 박종연 해양진흥공사 인프라금융부장은 “외국계 자본이나 외국 국적 공공기관의 진입을 우려해 시장 진입이 쉽지 않다”면서 “견실한 실적을 내는 기존 터미널은 그들만의 시장에서 거래되다 보니 확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선제적으로 시장 진입을 하려면 소수지분이라도 확보하는 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국적선사와 항만공사가 우량 터미널의 일부 지분을 우선 확보하고 정책금융기관이 금융을 지원해 투자 네트워크를 넓힌 뒤 단계적으로 운영권 확보까지 추진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해진공은 단기적으로 우량 터미널 지분에 우선 투자한 뒤 중장기적으로 국적 글로벌터미널운영사(GTO)를 육성하는 ‘선(先) 시장 진입, 후(後) 운영권 확보’ 전략을 제시했다.
또한 투자재원을 미리 마련해 우량 자산이 시장에 나왔을 때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블라인드펀드 조성도 제안했다. 박 부장은 “코로나19 이후 해운시황 회복으로 투자 여력을 확보했다”면서 “국책 금융기관들의 지원을 결합한 블라인드펀드가 현실적으로 실행 가능한 투자 플랫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해진공은 국적선사와 정책금융기관, 항만공사 등이 참여하는 펀드를 통해 북미와 유럽 등에서는 거래되는 기존 터미널 지분을 선점하고, 아시아에서는 국적 연근해선사의 수요까지 반영해 투자 대상을 발굴한다는 구상이다.
항만별 투자 전략 달라야
이어진 패널 종합토론에서는 해외 터미널 투자 전략과 정부의 지원 역할 등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정우영 법무법인 광장 대표변호사는 “전략적으로 터미널을 선택 투자해야 한다”면서 국가 전략과 선사 네트워크, 투자수익성 등에 따라 대상을 선별하고 자금 조달 방식도 달리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국가 전략상 필요한 터미널은 공적 재원을 활용하고, 선사는 항로의 핵심 허브가 될 거점을 확보하는 데 집중하는 한편, 수익성이 높은 자산은 재무적투자자(FI)와 연기금의 참여를 유도하는 식이다. 그는 국내 연기금과 FI를 항만 투자에 끌어들이려면 터미널이 장기간 안정적인 수익을 내는 자산이라는 신뢰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국내 항만의 수익구조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부산신항 5부두를 운영하는 비엔씨티(BNCT)의 최득선 대표이사는 “컨테이너터미널을 국가 경쟁 자산 또는 전략 자산이라고 표현하고 공적 자금을 투입해서라도 확보하려 하는데 국내 터미널은 과도한 경쟁과 낮은 하역료 구조에서 운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해외 터미널은 전략자산으로 평가하면서도 정작 국내 터미널은 지속적인 재투자가 어려운 수익구조에 놓여 있다는 설명이다.
최 대표는 “항만 운영사가 장기적으로 인프라에 투자할 수 있도록 안정적인 수익구조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며 “국내에서 항만 투자 역량과 수익 기반을 갖춘 뒤 이를 바탕으로 해외 진출을 확대하는 방안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윤상호 한국해양대학교 교수가 좌장을 맡아 패널 토론을 진행했다. |
정부는 해외 터미널 확보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무분별한 개발과 과열 경쟁은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김한울 해양수산부 해운물류국 항만물류기획과장은 “코로나19 이후 공급망 안정을 위해 해외 터미널의 중요성이 높아져 정부 차원에서도 확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면서도 “항만 투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고 경쟁도 치열한 만큼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 과장은 과거 동남아에서 항만 개발이 잇따르면서 과열 경쟁이 발생한 사례를 언급하며 투자 대상과 사업성을 면밀히 따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항만 개발은 경제 논리로만 이뤄지지 않는다”며 해당 국가와의 협력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범정부 차원에서 해외 항만 투자를 지원하겠다고 덧붙였다.
이날 조승환 의원은 개회사에서 “우리 기업들도 해외 터미널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해외 항만과 터미널 사업은 초기 투자 규모가 크고 투자 기간이 긴 데다 국가별 제도와 정치·경제적 위험까지 함께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개별 기업의 힘만으로 추진하기에 현실적으로 어렵다”면서 “민간의 노력과 함께 정부와 정책금융기관이 적절하게 역할을 분담하고 지원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박한솔 기자 hsolpark@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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