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3 16:02

더 세월(65)

저자 성용경 / 그림 하현
57. 두 사람이 머문 곳


그들은 자주 호텔에 가서 차를 마시곤 한다. 그런데 오늘은 차를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틀간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호텔에 들렀다. 요 며칠 사이 호텔에서 풀어야 할 만한 피로라도 쌓였던 것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서울 시내가 아닌 인천 송도에 있는 센트럴파크호텔을 찾은 이유가 궁금했다.

서정민과 이순정은 호텔방에서 부끄러운 듯 누워 있었다. 한 시간 이상 차를 몰고 왜 여기까지 왔는지 들이댈 핑계가 마땅치 않았다. 자동차 라디오에서 김건모의 ‘핑계’를 들은 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굳이 핑계를 찾는다면? 오늘 오전 10시부터 싱가포르에서 이뤄지는 트럼프와 김정은의 ‘세기의 만남’일 것이다. 인천 송도가 정상회담의 후보지로 떠올랐으나 결국 회담 장소는 싱가포르로 결정됐다. 서정민이 조용한 곳에서 TV를 시청하자고 제안한 것이 송도까지 오게 된 배경이 됐는지 모른다.

2018년 6월 12일 오전 10시 바깥 햇살이 호텔방으로 들어와 커튼을 닫았다. TV 화면이 더욱 선명하다. 둘은 침대에 기대 편하게 TV를 보고 있다. 마침 도널드 트럼프와 김정은이 화면에 나타나 서로 다가가 악수한다. 감격적인 장면이다.

침대의 두 남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고 서로를 껴안았다.

“회담이 잘 될 것 같지 않아요? 준비를 많이 한 것 같아요.”

이순정이 한 손을 서정민의 가슴에 얹으며 말했다.

여자의 손이 다소 떨린다. 두 사람이 같은 방에서 밤을 새운 적은 있지만 같은 침대를 쓴 건 처음이다. ‘세기의 접촉’이라고 해도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 같았다. 이팔봉 회장이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 한 후 처음으로 침대를 같이 쓰는, 이른바 ‘동침’을 하게 된 것이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한국의 이익은 배제하고 자국 이익 위주로 회담할까 걱정되는구려. 우방보다 돈을 먼저 생각하는 트럼프라서.”

돈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사업가 서정민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순정의 생각도 앞서 달린다.

“북한이 열리면 우리 사업도 확장되겠지요. 남포항에 물류센터를 짓고요.”

“떡도 안 먹었는데 김칫국부터 먼저 마시는구려.”

“샌토사 섬은 보안이 잘돼 정상회담 장소로 좋다네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싱가포르는 북미회담으로 162억 원을 썼으나 6,200억 원 이상의 경제효과를 얻었다고 한다.

“그럼 송도도 섬이니 우리를 위한 보안은 괜찮겠지?” 

서정민이 싱거운 농담을 했다. 

“우리 사이에 무슨 보안이 필요한가요. 더구나 송도는 이제 섬이 아니잖아요.”

어느새 여자의 코르셋과 브라가 침대 아래로 슬그머니 떨어졌다. 남자의 들뜬 마음을 느낀 듯 여자는 더 세게 남자의 허리를 조였다. 남자는 여자의 입김에 온몸이 기화하는 것 같다. 24시간이 썩 길지 않은 시간처럼 느껴졌다.

거칠어진 숨소리에도 그들의 시선은 화면의 정상회담 장면을 놓치지 않고 더듬더듬 대화를 이어나갔다.

“유월은 TV바보가 되기 좋은 달이네요. 북미회담과 지방선거에다 월드컵 경기까지….”

말하는 도중에 이순정이 다리를 움츠렸다. 

서정민의 손이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북미정상회담은 비정상적 정상회담이고 심리전이라는 말도 있어.”

“그게 무슨 뜻이에요?“

“회담 개시하자마자 동영상을 틀어서 핵폭탄 맞을지, 아니면 비핵화로 평화를 이루고 번영할지 택일하라고 협박했다더군. 개혁 개방을 하면 남한처럼 번영할 거라면서 당근도 주고….”

“트럼프는 정치를 조폭식으로 하나 봐요.”

“꿩 잡는 게 매라고 했지. 난폭했던 김정은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트럼프뿐인 것 같아.” 

번영이 북한에서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미래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고 트럼프는 김정은을 구슬린다.

일하는 지도자상을 부각시키기 위해 인민복을 입은 김정은과 유난히 긴 붉은색 넥타이를 맨 트럼프는 너무도 대조적이면서도 닮은 점 하나가 있었다. 둘다 예측불허의 인물이라는 점이다.

“가야할 소명이 있으면 달팽이집을 끌고라도 가야죠.”

이순정이 목청을 높여 신이 내려준 소명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회담 도중 두 지도자는 만족한 부분이 있었던지 힘차게 악수를 나누었다.

이때 서정민과 이순정은 호흡이 불편하여 잠시 멈칫했다. 서로의 입술에 달달한 압박을 느꼈기 때문이다. 입술은 손보다 훨씬 뛰어난 남녀의 사랑을 전하는 전도체란 생각이 들었다.

“4년의 만남 끝에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되었군. 이젠 우리의 낙원을 만들어가고 싶어.”

그는 조금은 부끄럽고 미안해했다.

이순정은 감정의 변화를 느끼면서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움과 연정에 얼굴이 붉어졌다.

“우리가 대낮에 영화를 찍고 있는 건 아니죠?”

서정민은 가슴에 손을 얹으며 긴장한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심장 이 녀석, 내 허락도 없이 마구 뛰고 있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출렁인다.

둘은 이날 긴 피로를 수습해야만 했다. 순면으로 만든 흰 시트가 땀으로 젖은 것을 보며 그는 작은 희열을 느꼈다.

서정민은 미세먼지 없는 파란 하늘을 하루 동안 보지 않았지만 나가고 싶은 미련이 들지 않았다. 세월호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철저하게 해방된 것은 오늘이 처음이라고 느꼈다. 이순정이 고마웠다.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그녀가 가르쳐준 셈이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처럼 홀가분했다.

이튿날인 6월 13일은 지방선거일이었다. 사전투표를 마쳤기 때문에 두 사람은 투표장에 갈 필요 없이 호텔방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데 낮 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선거 결과에 사람들은 크게 놀라는 것 같지 않았다. 나태한 보수는 민심의 쓰나미에 휩쓸려 존재감이 사라졌다. 폭삭 망하는 것이 보수가 사는 길이라고 선거 전부터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싹쓸이의 걱정은 있었다. 동종교배는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분재는 뿌리를 잘라주지 않으면 빨리 죽고, 사람은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빨리 늙는다고 했어요.”

이순정은 선거 결과에 대해 그렇게 코멘트했다.

“순정 씨, 그런 깊은 말도 알고 있었어요?” 

일어나 눈 화장을 하고 있던 그녀의 눈썹 펜슬이 하마터면 고양이 눈을 그릴 뻔했다. 서정민이 양팔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여성이 정성 들여 화장할 때 매력이 발산한다고 했던가.

6월 14일 러시아 월드컵이 개막했다. 지구촌 최대의 스포츠 축제는 한 달간 계속된다.

두 남녀는 개막식을 사무실에서 편안한 자세로 시청했다. 개막전에서 개최국 러시아가 사우디아라비아를 5대 0으로 이겼다. 아시아의 자존심은 큰 상처를 입었으나 러시아 국민은 더운 날 청량음료의 시원함을 맛본 것처럼 크게 환호했다.

그 후 멕시코가 피파 1위 독일을 2대 1로 이기자 공이 둥글다는 걸 실감했고, 일본이 콜롬비아를 2대 1로 무너뜨렸을 때는 운칠기삼의 행운이 존재함을 깨달았다.

아르헨티나가 크로아티아에게 3대 0으로 졌을 때는 인간적으로 메시에게 측은지심이 생겼다. F조 마지막 조별리그에서 우리나라는 독일을 2대 0으로 이겼다. 일 퍼센트의 가능성에 도전해 기적을 만들어낸 순간이었다. 

남녀는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자정 무렵에 빌딩을 나섰다. 이순정은 왜 늦었냐고 아빠가 물으면 러시아 월드컵을 시청했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웠다. 하지만 산전수전공중전 다 겪은 이팔봉 회장이 최근 둘의 애정 행각을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이 작품은 세월호 사고의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허구적 상상력을 가미한 창작물이며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기업 지명 등은 실제와 관련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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